30th HISTORY OF K-SURE

성장스토리

한국무역보험공사 30년

01. 9부 능선을 넘다

한국수출보험공사(이하 '공사') 설립 준비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무렵이었다. 정부와 기타 기관에서의 출연금을 바탕으로 기금도 마련했고 신설 공사의 체계를 세우기 위한 제반 작업도 한창이었으나, 여전히 남은 문제가 있었다. 인력 확보 과제였다. ‘수출보험’ 업무란 것이 워낙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좀체 적합한 인력이 모이질 않았다.
이동훈 설립추진위원장(전 공업진흥청장)의 고민이 깊어갔다. 1968년 수출보험법 발효 당시 대한민국 최초로 공적수출신용기관(ECA)에 대한 경험을 쌓았던 이동훈 설립추진위원장은 1991년 5월 부임 이후, 자신을 내던지는 자세로 신설 공사의 뼈대 세우기에 전력을 다했으나, 오지 않겠다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들일 도리는 없었다. 좀처럼 답을 찾지 못한 채 아까운 시간을 보내야 했고, 결국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순간에 직면하고 말았다.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1992년 6월의 결심이었다. 이동훈 위원장은 이광수 당시 수출입은행장과의 독대를 요청해 소속 행원들에 대한 채용설명회를 부탁하고 나섰다.

수출보험법안 통과 관련 보도기사(매일경제, 1968. 11. 8)
행장님, 무례한 부탁인 줄 잘 압니다.
그렇지만 수출 대한민국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꼭 좀 들어 주십시오.

며칠 후 이광수 행장을 비롯해 수출입은행 전 임직원이 강당에 모였다. 사람들 얼굴에서는 시큰둥한 표정이 읽혀졌다. 이동훈 위원장 입장에선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가벼운 인사말은 스치듯 지나치고, 곧바로 선진금융 시장을 휘감고 있는 새로운 물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선진 금융시장에선 이미 보험, 증권, 투자신탁 같은 업무가 금융의 중심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해는 지고 있는데 익숙하다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겠습니까?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수출보험 업무를 통해 여러분은 금융 최전선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합시다. 국내 금융권 최고 수준의 대우를 보장하겠습니다.

강당에 조용한 파란(波瀾)이 일었다. 위원장의 무게 실린 말에 이미 마음이 동하고 있었다. 무한한 도전의 기회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공사. 그가 제시한 비전은 듣고 있던 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설명회 자리가 끝나고 곧 입사 희망원서가 전달되었다. 처음의 시큰둥한 반응과는 달리 너도 나도 입사원서를 받아갔다.
당시 채워야 할 모집 인원은 200명 남짓이었다. 그러나 이후 원서를 회수한 결과 270명이 넘는 인원의 서류가 접수되었다. 이로써 설립위원회는 ‘출범’ 봉우리까지 이어진 능선의 9부 지점을 넘어설 수 있었다. 지금의 K-SURE를 있게 한 출범기의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