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항아리를 채우는 기쁨 - 숨은 꽃을 닮은 수녀님께

새김아트_정병례

| 이해인 수녀의 흰구름 러브레터 |

며칠 동안 출장 겸 휴가를 다녀오니 봄꽃들은 거의 다 지고 무성한 나뭇잎들이 먼저 눈에 띄네요. 그래도 나무들 사이사이 붉은색, 노란색 튤립들이 환히 웃고 라일락 향기들이 바람에 실려와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자목련과 모란꽃의 자색이 새삼 황홀하군요.

적당히 어질러진 채 내가 자리를 비웠던 침방에는 누군가 환영의 뜻으로 두고 갔을 앙증스런 꽃병과 정리된 빨래 보따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복을 입자마자 외출을 해서 그냥 걸어둔 검은 수도복과 머릿수건을 빨아서 메모해둔 글씨를 보고 단번에 나는 수녀님의 손길인 줄 알았지요.

아무리 허물없이 지내는 수녀원 동기이고 친구지만 수녀님의 묵묵한 애덕 실천에 늘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수녀님이 나보다 겨우 두 살 위인데도 사람들은 10년 이상 차이 나는 줄 알고, 나도 종종 그렇게 느낄 때가 있답니다. 그것은 수녀님의 과묵하고 깊이 있고 몸에 배어 있는 봉사정신, 수도자다운 겸허한 인품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수녀님이 옆에서 간병해주고 힘이 되어준 일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원 밖을 나갔다 오면 하도 많은 기도 부탁을 받아 오늘은 아예 기도 항아리 하나를 준비했답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 있는 장영희 교수가 준 자그만 병엔 마침 ‘prayers’라는 단어가 적혀 있기에 ‘기도지향’이라 쓰고 부탁받은 내용들을 메모해 넣었어요.

남편을 살리고자 자신의 콩팥을 떼어준 보람도 없이 며칠 만에 사망해 오열하는 내 독자이며 시인인 자매를 위한 기도, 성정체성으로 혼란을 겪으며 고민하는 어느 친구를 위한 기도, 여자친구가 자살로 생을 마감해 실의에 빠져 있는 청년을 위한 기도, 가까운 이들도 이해 못하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어느 주부를 위한 기도, 수십 년 만에 출소해도 갈 곳이 없어 고민하는 재소자를 위한 기도, 어렵게 직장을 구했으나 상사와 동료들이 왕따시켜 사표를 쓰고 싶다고 하소연하는 우리 동네 아가씨를 위한 기도, 9.11테러와 세월호 참사에 자식을 잃은 부모를 위한 기도, 실연과 실직에서 오는 좌절로 종종 자살충동을 느낀다며 편지를 보내오는 이들을 위한 기도, 술을 끊고 싶어 단주 모임에도 나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속상하고 자기가 술을 끊을 때까진 결혼도 못할거니 계속 지켜봐달라고 고백하는 어느 일용직 청년을 위한 기도, 반복되는 항암 방사선 치료에 힘들고 지쳐서 이제 그만 중단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지만 사실은 살고 싶다고 고백하는 내 오래된 독자를 위한 기도 등등.

써도 써도 끝날 것 같지 않은 명단을 일단 정리해서 항아리에 넣어두고 촛불을 켜니 나의 글방이 하나의 자그만 경당이라도 된 듯 흐뭇합니다. 기도 항아리를 채워가는 일은 부담이 되더라도 가장 기쁘고 보람되며 아름다운 일이라 여겨집니다.

부탁만 많이 받고 제대로 하지 못한 기도를 잘 시작해야만 그동안 넘치게 받은 기도의 빚을 조금씩이라도 갚는 것일 테지요? 기도 여정의 동반자로서 수녀님도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잘 기도할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늘 푸른 소나무처럼, 숨어 피는 꽃처럼 은은한 덕의 향기를 지닌 수녀님과 오늘은 자비의 덕을 간구하며 마음에 꼭 드는 이 기도문을 함께 바치고 싶어요. 이렇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과정 또한 기도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 제 눈이 자비로워지도록 도우소서. 그래서 제가 누구라도 겉모습만 보고 의심하거나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이웃의 영혼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알아차리고 그를 도울 수 있게 하소서.

제 귀가 자비로워지도록 도우소서. 그래서 제가 이웃에게 필요한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며, 이웃의 고통과 탄식에 귀를 막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제 혀가 자비로워지도록 도우소서. 그래서 제가 이웃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각자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하게 해주소서. 제 손이 자비로워지고 선행으로 가득 차도록 도우소서. 그래서 제가 이웃에게 좋은 일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은 제가 대신 짊어지게 하소서.

제 발이 자비로워지도록 도우소서.그래서 제가 늘 이웃을 도우러 급히 달려가며 저의 무기력과 피로를 잘 다스리게 하소서. 저의 참된 휴식은 이웃에 대한 봉사에 있나이다. 제 마음이 자비로워지도록 도우소서. 그래서 제가 이웃의 모든 고통을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제가 누구도 미워하지 않게 하시고, 저의 감정을 악용할 사람들과의 관계도 성실히 돌보게 하소서. 제 자신은 예수님의 자비로운 마음속에 굳게 가두어 두겠나이다. 저의 고통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겠나이다.

오, 저의 주님, 제 안에 당신의 자비가 머물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저에게 세 가지 자비를 익히라고 명하셨나이다. 한 가지는 온갖 형태를 지닌 ‘자비로운 행위’이고, 다른 한 가지는 ‘자비로운 말’입니다. 행동으로 베풀 수 없는 자비는 말로 실행해야 합니다. 나머지 한 가지는 ‘기도’입니다. 행동이나 말을 통해 자비를 베풀 수 없을 때에는 늘 기도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저의 기도는 제 몸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이릅니다. 저의 예수님, 당신 안에서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당신께는 모든 일이 가능하나이다.

_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이해인 부산 베네딕도 수녀회에 몸담고 있습니다. 수도자로서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사색을 조화시키는 수녀 시인입니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이후 다수의 시집과 산문집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 등을 냈습니다.

출처 : 월간샘터 2016년 6월호 (http://www.isamto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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