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동생인 조나단의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는 인식론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제시했다. 인간의 기억이 불완전하며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또한 인간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기억을 왜곡한다는 영화의 명제는 무드셀라 증후군과도 닮았다. 이 증후군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969세까지 장수했다는 인물인 무드셀라에서 비롯되었는데, 에녹의 아들이며 라멕의 아버지요 노아의 할아버지였던 무드셀라가 과거를 좋은 시절로 추억하며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다소 현실 도피적으로 과거의 일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포장하며 그리워하는 심리를 일컫는다.
날조된 기억의 굴레 안에서
그는 진실을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전직 보험 수사관이었던 레너드는 자신의 아내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충격으로, 이후 10분 이상 기억을 지속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자신의 이름, 그리고 아내를 죽인 자인 ‘존 G’를 찾아 내서 복수하겠다는 것. 10분이 지나면 방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증거를 찾아냈는지 잊고 마는 스스로를 위해 그는 메모와 문신, 사진으로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구성을 통해, 그의 기억은 날조되어 왔음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그의 주변을 맴도는 나탈리는 레너드를 이용하고 있었고, 오히려 레너드가 범인이라고 생각했던 테디는 레너드 아내의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였으며 레너드를 이용해 마약상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어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고 나면 아내를 죽인 것은 사실 주인공인 레너드였음을 알 수 있다. 2000년에 개봉하여 수많은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작년에는 리마스터링 버전으로도 개봉했었던 영화 ‘메멘토’의 줄거리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것은 힘들었던 기억의 대부분을 잊고 말았기 때문이다. 메멘토의 레너드, 무드셀라처럼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별적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지난날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리워지는 그때로 다시
예를 들면 이렇다. “현재 남자친구는 무심한 편인데,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남자친구는 이렇지 않았어. 둘 다 첫 연애라 그런지 목숨 걸고 연애를 했지. 그는 길 가다 내 신발끈이 풀어지기라도 하면 얼른 허리를 굽혀 묶어주곤 했고, 자신의 월급을 탈탈 털어서 내 생일 선물을 사주기도 했었지. 제때제때 연락도 잘 되고 성실하고 다른 여자에게 한 눈 팔지 않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지금은!”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여인을 주변에서 본 적 없는가? 혹은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등교해서 아이들과 몰래 까먹는 도시락은 왜 그렇게 맛있던지, 함께 만화책을 돌려보던 스릴은 요즘 개봉하는 공포 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깨알 재미였지. 라디오에 사연 보내서 당첨 되기도 하고, 버스에서 마주친 이성을 남몰래 지켜보기도 하고. 정말 아름다운 시절이었어”라며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군대 시절 추억, 백수 시절 추억 등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레퍼토리도 다양하다.
무드셀라 증후군의 원인으로는 두 가지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하나는 기억의 ‘망각 적응’과정.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과 버밍엄대학의 합동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과거를 회상하려 할 때 이미 저장되어 있던 다른 기억을 잊는다고 한다.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을 떠올리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기억을 잊게 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다른 한 가지는 기억의 재응고화가설이다. 오래된 기억을 회상, 즉 의식으로 불러내면 그 기억은 일시적으로 다른 정보를 덧붙일 수 있도록 ‘말랑말랑’해지는데, 이 때 어떤 정보를 조합하느냐에 따라 기억이 다른 내용으로 저장될 수 있다는 것. 한마디로 “학창시절엔 학주에게 일주일에 4번 불려갔었고, 성적이 엉망이었고,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다”는 기억이 있다면 이를 회상한 뒤 다시 저장하는 과정에서 일부 삭제, 일부 검열 및 사실 관계 왜곡이 일어나게 되는 것.
무드셀라 증후군으로 우울해하는 당신에게
A
현실이 힘들지 않은지 점검하라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 누구라도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에 기대려고 할 것이다.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의 도피처로 쓰고 있다면, 잘못된 기억에 의존하는 것 뿐 아니라 힘든 현실을 방치하는 두 가지 죄를 짓게 되는 셈이다. 현재 내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해결에 나서야 한다.
B
과거로 돌아간다면 정말 행복할까? 당신의 입맛에 맞게 편집했던 기억을, 잘라냈던 필름을 다시 붙여보자. 정말 옛 남친은 좋은 점만 있던 사람이었나? 혹시 첫 연애라 말도 안 통했고, 얼토당토않은 발언으로 사람 애간장을 녹이거나, 데이트 코스 하나 시원하게 못 짜오는 통에 답답하지는 않았던가? 학창시절에는 일시적으로나마 왕따나 은따를 당해 괴로웠거나 그에 가담해서 죄책감을 느낀 일은 없었던가? 성적 때문에 고민하고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떤 존재인가 괴로워하지는 않았던가? 군대를 나가기만하면 무의미한 제도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눈물 젖은 초코파이와 함께 다짐하지는 않았던가?
C
비운 만큼 채워진다. 옷장에 정체불명의 옷들이 가득 쌓여 있다면 새 옷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과거에 대한 집착으로 채워진 당신의 마음에는 현재 당신이 소유한 소중한 대상, 혹은 추구하는 목표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당신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며,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 이현수(MBTI 전문작가) / 그림. 최세정
